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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8

[북 리뷰] 정보라, 《저주토끼》 이 책이 요즘 여기저기서 입소문 좀 타고 있는듯하다. 밀리의 서재에 있길래 출퇴근길에 호로록 다 읽었다(사실 잘 안읽히는 단편은 대충 넘겼다). 언제 마지막으로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공포문학은 정말 오랜만에 읽은 것이다. 는 10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이야기에서 피, 내장, 배설물이 적나라하게 난무하고, 누군가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의 진짜 잔혹한 부분은 내장이 튀어나오고 인육이 끓는 장면이 아니라 결말에서 느껴지는 서늘하도록 쓸쓸한 심상이다. 원래 세상은 쓸쓸한 곳이고 모든 존재는 혼자이며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 혹은 복수는 경우에 따라 반드시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필요한 일을 완수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쓸쓸하고 인간은 여전히 외로우며 이 사.. 2022. 5. 18.
[북 리뷰] 최은영, 《밝은 밤》& 《쇼코의 미소》 0. 몇 년 전, 오랜 친구가 선물해준 《쇼코의 미소》로 최은영 작가를 알게 되었다. , , 는 그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단편들이다. 세 이야기에서는 공통적으로 가족도 연인도 아닌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지지하고 곁을 지키는 사람들이 나온다. 《밝은 밤》에서도 물리적으로 곁에 있지 않을 때에도 서로에게 마음의 방을 내어주고 사는 사람들이 나온다. 1. "증조모는 새비 아주머니를 잘 알지 못했던 그 때부터도 새비 아주머니를 잃을까봐 덜컥 겁이 났다. 언젠가 새비 아주머니가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고 더이상 그 말간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얼어붙은 얼굴로 자신에게 실망했다며 등을 돌린다면 숨쉬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사람들은 원래 기래.' 고조모가 증조모의 마음속에서 말했다. '사람한테 기대하지 말라우.. 2021. 12. 16.
[북 리뷰] 허수경,〈레몬〉/ 시집《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레몬 당신의 눈 속에 가끔 달이 뜰 때도 있었다 여름은 연인의 집에 들르느라 서두르던 태양처럼 짧았다 당신이 있던 그 봄 가을 겨울, 당신과 나는 한 번도 노래를 한 적이 없다 우리의 계절은 여름이었다 시퍼런 빛들이 무작위로 내 이마를 짓이겼다 그리고 나는 한 번도 당신의 잠을 포옹하지 못했다 다만 더운 김을 뿜으며 비가 지나가고 천둥도 가끔 와서 냇물은 사랑니 나던 청춘처럼 앓았다 가난하고도 즐거워 오랫동안 마음의 파랑 같을 점심 식사를 나누던 빛 속, 누군가 그 점심에 우리의 불우한 미래를 예언했다 우린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우린 그냥 우리의 가슴이에요 불우해도 우리의 식사는 언제나 가득했다 예언은 개나 물어가라지, 우리의 현재는 나비처럼 충분했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그리고 곧 사라질만큼 아.. 2021. 12. 1.
[북 리뷰] 모니카 마론, 《슬픈 짐승(Animal triste)》& 오르한 파묵, 《순수박물관(Masumiyet Müzesi)》& 오스카 코코슈카, <바람의 신부>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사랑밖에 없다. 그것이 대답이었고, 그 문장을 마침내 말로 꺼내 얘기하기 오래 전부터 이미 나는 그 대답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Post coitum omne animal triste est." 모든 짐승은 교미 후에 슬프다. 애인이 학부 때 들었던 라틴어 수업에서 배웠다고 알려준 이 라틴어 경구는 열정적인 순간이 격렬하게 지나가고 나면 인간은 허무함을 느낀다는 의미로도 의역되어 사용된다고 한다. 이 말을 들으면 오스카 코코슈카의 그림 가 떠오른다. 그림에는 아마도 사랑을 나눈 후(post coitum)인 것 같은 흐트러진 이불 위의 연인이 있다. 여자는 곤히 잠들어 있고, 남자는 우울하거나 불안하다(animal triste).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읽고 .. 2021. 11. 28.
[북 리뷰] 구병모, 《파과》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2020.9.18. ​ '여성노인'인 '킬러'라는 주인공 캐릭터의 독특성, 제3의 성으로 취급되어온 여성노인의 연정과 욕망에 대한 묘사가 돋보일 뿐 아니라, 인물이 저마다 가진 삶의 태도에 대한 일관성을 흐트러뜨리는 '드팀새'에 대한 포착이 감동적이다. 또한 아름다운 한국어 단어들이 조개껍데기 처럼 깔린 모래밭 같은 소설이었다. 2021. 11. 17.
[북 리뷰] 최진영, 《구의 증명》 몸은 고되고 앞날은 곤죽 같아도, 마음 한구석에 영영 변질되지 않을 따뜻한 밥 한 덩이를 품은 느낌이었다. 걱정되지? 그 마음이 제일 중요한 거야. 그 마음을 까먹으면 안 돼. 걱정하는 마음? 응. 그게 있어야 세상에 흉한 짓 안 하고 산다. 2020. 11. 02. 사람대접을 애써 벌어야 하는 시대의 연인들. 구와 담의 고독과 불안이 옮아오는 글이다. ​ '식인행위'가 광기라기보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남겨진 사람의 자기구명을 위한 발버둥으로 읽힌다. ​ 우리는 자신을 잃어가면서도 불러볼 이름 몇 개가 필요하고, 그들을 먼저 보내고 겪을 고통의 가능성을 감수하면서도 서로에게 얼마간 마음을 기대며 산다. 2021. 11. 17.
[북 리뷰] 나쓰메 소세키, 《마음》 좋은 작품은 누구에게나 있으나 남들에게 드러내보이기 껄끄러운 인간의 내밀한 욕망과 본성을 훌륭하게 포착한다. ​ 또한 그러한 욕망과 본성이 인생의 방향을 돌이킬 수 없는 국면으로 전환하는 사건에 대해서 흡입력 있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 누구에게나 자신이라고 생각하거나 자신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모습이 있다. ​ 이성은 정념과 상반되는 방향으로 그 의지를 이끌어 나가지 못한다는 것이 데이비드 흄의 통찰이었다. ​ 인생의 어떤 시점에 정념은 인물들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던 자신을 흩어버렸고, 죽은 이들은 위선자인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서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 나쓰메 소세키의 에서 인물들은 살아있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정념의 노예가 되고 만다. ​ 그러나 정념에 이끌려간.. 2021. 11. 17.
[북 리뷰] 로맹 가리, 《레이디 L》 레이디 L은 아르망이 그녀에게 가르친 것과 그의 존재방식 사이에, 그가 주장하는 절대적 자유와 한가지 사상에 묶인 그 자신의 예속상태에 모순이 있었다는 것을 오늘날에는 안다. 절대적 자유에 대한 생각과 그 생각에 대한 헌신 사이에도 모순이 있었다. 그가 주장하던 인간의 자유와 한가지 이념, 한가지 이데올로기를 향한 그의 절대적 복종 사이에 모순이 있었다. 그녀는 오늘날, 인간이 정말로 자유로워야 한다면 자신의 생각으로부터도 자유롭게 처신해야 하고 논리에 전적으로 이끌리지 말아야 하며 심지어 진리에도 묶이지 말아야 하고, 모든 것에, 모든 생각에 인간적 여백을 남겨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유로운 인간으로 남으려면 아마도 자신의 생각과 신념마저도 뛰어넘을 줄 알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논리가 엄격할수록.. 2021.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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