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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log/사는 존재

[Lifelog] 2023년 여름의 근황

by 노무사 송글 2023.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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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를 했다. 회사원 기준으로 생각하면 빨리 때려치운 것이지만, 법인 소속 노무사 기준으로는 적지 않게 다녔다는 정도로 평할 수 있을 것 같은 기간을 근무했다. 그동안 동기들 평균 이상 횟수의 이직을 경험하면서 몇 개의 소규모 조직을 거쳤다. 여러 사람의 닮고 싶은 면과 닮고 싶지 않은 면을 접했고, 내가 어떤 환경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어떤 일을 할 때 자부심을 느끼면서 일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공부는 일단 해 두면 어디든 써먹을 데가 반드시 온다는 것도.
 
n년 전 이맘 때도 한여름이었다. 결과적으로 일주일 만에 퇴사한 모 법인이 있었는데, 출근 2~3일 차에 벌써 뭔가 잘못됐다는 본능적인 쎄한 느낌이 발끝부터 올라왔다. 대표는 별 쓸데없는 걸 가지고 대단한 것을 가르쳐준다는 듯이 기선제압을 하려 들면서 정작 중요한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하고 당황했다. 내 학벌과 이력을 억지로 깎아내리려고 가스라이팅을 시도하는데 열등감이 너무 빤히 들여다보여서 타격감은 하나도 없었고, 저 나이에 저런 질 낮은 수법으로 까마득한 후배를 길들여 보려고 애쓰는 꼴이 매우 한심하고 같잖아 보일 뿐이었다. 그밖에 다른 조직에서도 나이 및 연차와 실력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는 여러 사건들이 있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비로소 인품이나 실력 면에서 나도 나중에 저런 선배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할만한 분을 만날 수 있었다. 적당한 거리감과 존중과 위임. 분명 지치고 회의감이 드는 날도 있었지만 아깝지 않은 시간이었다. 또 당분간은 한 명의 회사원으로 열심히 살겠지만, 그동안 한 명의 전문가로서의 나를 누군가 믿어줬던 경험, 나의 견해에 의지하고 있는 의뢰인과 함께 지도를 그리고 출구를 찾아 헤엄쳐 나갈 때의 중압감 섞인 희열을 잊지 못할 것 같다.

"Remember fondly the discomfort you felt when you were asked to push yourself farther than you were ever sure you could go. And the elation when you finally got there."


미드 The Office의 Jim Halpert로 나왔던 배우 John Krasinski가 했던 브라운대학교 졸업연설 중에서 이 말이 딱 생각난다.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 이미 해본 것 이상을 해내야 하는 상황에서 느끼는 중압감은 끝내 그 지점에 도달한 순간에는 희열로 변하고, 시간이 지나고 그 순간을 회상할 때는 달콤 씁쓸한 자부심의 맛으로 변한다. 요가 수련 마지막의 사바 아사나처럼.
 

 
퇴사 전에 남은 연차를 사용하면서 카페에서 개인적인 프로젝트도 좀 처리하고, 잔뜩 끓여둔 토마토 수프와 같이 먹을 깜빠뉴를 사러 동네 빵집에도 갔다. 원하는 빵이 나오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해서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서 레몬셔벗도 한스쿱 사 먹었다. 아아 올해는 정말 무서울 정도로 뜨거운 여름이다.

이번에는 이직 전에 틈이 생겨서 모처럼 잠깐 쉬게 되었다. 여름은 나에게 유난히 견디기 힘든 계절인데, 어딘가 조용한 곳으로 혼자 가서 책만 읽고 글만 쓰면서 조금 쉬고싶다. 가을이 조금 일찍 온다는 홋카이도로 훌쩍 다녀오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동네 근처에 미국식 핫윙 가게가 생겼길래 사왔다. 맛은 조금 생소했지만 수프 끓일 때 넣고 남은 셀러리랑 맥주랑 같이 먹으니까 맛도 있고 영양균형이 맞아 보여 죄책감도 덜 수 있고 잘 어울렸다.
 

 
저렇게 낮술 하다가 취하고 배불러서 저녁 산책을 나가 2만 보 넘게 걸었다. 가는 길에는 약간 알딸딸한 채로 걷다가 오는 길에는 아이스커피를 마시면서 서서히 술이 깼다. 기껏 취해놓고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술을 마시고 집에 오는 길에는 꼭 커피가 마시고 싶더라. 어느 정도 이상 취해 있는 상태가 왠지 불안하게 느껴져서 그런 것 같다. 열대야의 부드럽고 텁텁한 공기는 집을 나오는 길에는 아늑하게까지 느껴지는데, 오는 길에는 습기가 쌓이고 쌓여서 질척해진다. 올해도 여전히 힘든 뜨겁고 눅눅한 이 여름도 여름밤의 붕붕 뜬 활기라도 위안 삼아 무사히 지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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