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log] Vanilla Sky

2022년 기준으로 한국인 여성의 기대수명은 85.6세이고, 나의 두 할머니들은 각각 1930년에 태어나 2018년, 1934년에 태어나 2020년에 돌아가셨다. 불의의 죽음이 아니라면 아마 나도 그 이상의 긴 세월을 살아야 할 가능성이 클 것이다. 물론 가는 데는 순서 없다지만 대충 평균적인 수명을 누린다고 했을 때, 지금은 전체 인생의 3분의 1 지점쯤을 지나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중에 가장 좋은 것, 좋은 것 중에 가장 현실적인 것을 선택하는 방향으로 갔다. 그래서 그런지 그동안 결과만 놓고 보면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계획했던 것들을 이루지 못한 적은 없었다. 가장 사랑하고 가슴 뛰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성실히 공들여 성취한 것들이 자랑스럽다고, 그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전체 인생의 3분의 2 지점 쯤에 가서도(물론 그때까지 무사히 잘 살아있다면) '그 때 그러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려면 아직 남은 삶의 중대한 전환점마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 여전히 고민한다. 뭐 물론 고민하는 만큼 성공률이 올라가지는 않을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것을 랜덤한 요소가 좌우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남의 말도 좀 듣는 거랑 남의 말에 휘둘리는 건 한끗차이인데... 결국 결과론일 것이다. 마이웨이 해서 실패하면 '다들 그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거다, 옛말이 틀린거 없다' 이렇게 되는거고, 성공하면 '역시 사람은 누가 뭐라든 주관과 신념이 뚜렷해야 한다'가 되는거고.


예전에 세줄일기라는 어플로 수험기간에도 꾸준히 짧은 일기를 썼다. 며칠 전에 5~6년 전의 일기를 다시 봤는데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은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놀랐다. 아마 그러니까 가깝다가도 멀어진 시절인연도 있는 것이고. 그런데도 낯선 타인인 과거의 내가 한 선택을 현재의 내가 책임지면서 사는 것이구나. 원래 산다는 게 그런 원리구나.

비교하고 자책하는 것은 원래 모든 인간의 본성인지, 이 나라 문화의 흐름에 절여진 것인지, 개인적인 인성의 결함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런 것에서 자유로운 주체적인 삶을 지향하기는 했지만 지금까지는 자유인이 되는 데 실패했다.
왜 그런지 한 번 생각해보니 이건 근본적으로 그동안 여러 사회적 관계에서 (직간접적으로) 선의와 연대감보다는 악의를 더 많이 경험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개인적인 배경을 떠보고 견적을 내는 유해한 타인은 어디에나 일정 비율 있었다. 안타깝게도 개중에는 대놓고 불쾌한 악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이에서도 분명히 감지할 수 있는 그런 의도를 읽은 경우가 있지만 그냥 모른척 하기도 했다.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고 고민을 나누면서 가까워진듯 하다가도 결국 어느 갈래길에선가 서서히 애매한 사이가 되어버린 사람들이 한 무더기 있고, 그래서 여전히 사람들에게 최후의 경계심을 풀지 못하는 편이다.
<나의 해방일지>를 다시 보고 있는데 다시 봐도 내 마음을 읊는 것 같은 부분이 많았다. 모든 관계를 노동이라고 느끼고 사람들 떠드는 소리도 싫고 뭐라고 대꾸하고 맞장구치기도 싫으면서 동시에 느슨하고 즐거운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열망해서 고통받는다.

우연히 좋은 음악을 들을 때, 좋은 책을 읽고 좋은 영화를 보게 될 때, 문득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순간을 오랫동안 붙잡고 있고싶다. 그래서 인류애가 바닥날 때 한 번씩 마음을 건드리는 노래를 골라잡고 주구장창 반복해서 듣는다. 누구에게나 무장해제되고 연약해지고 사랑스러워지는 순간이 있다는, 아니면 적어도 한 때는 그런 순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일은 논증이나 이해로는 부족하다.

살아갈수록 많았던 가능성을 줄여가며 그 중 일부만 현실로 빚어낸다. 그럴 수밖에 없다. 뭔가가 없거나 부족한 상태 그 자체가 아니라 원래 있어야 마땅한 것이 없는 상태만 결핍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인생에 원래 당연히 있어야 마땅한 것은 목숨 하나 밖에 없다. 없는 것을 멋대로 잃어버린 것으로 여기면서 죽고싶어하는 미친 완벽주의자로 살지 말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