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log][밑미 리추얼 외면일기] 레몬 (2023.08.09.)
2023.08.09. 월요일
레몬
집에 시집이 몇 권 있는지 세어 보니 열 권이 있다. 이사 다닐 때마다 짐이 될 것 같아서 정말 종이책으로 소장하고 싶은 책이 아니라면 거의 전자책으로 소장하는데, 시집은 왠지 침대 머리맡에 두고 가끔씩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꺼내 먹는 사탕처럼 한 장씩 넘기며 읽어야만 할 것 같다.
시집 한 권을 사서 쭉 읽다 보면 난해하거나 별 울림이 없는 시도 많지만, 드물게 번개처럼 마음을 뚫고 들어오는 시도 있다. 뜨거운 모래밭을 걷다 내 마음에 꼭 드는 문양의 조개껍데기를 주워 유리병에 담아 두고 생각날 때마다 꺼내보는 기쁨, 나에게는 그런 순간을 건져 내는 것이 시집을 읽는 맛이다.
애인은 좀처럼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모습을 보기 어려운 사람이다. 그런 사람으로서는 상당히 의외로 종종 나에게 시집을 사다 준다. 그는 이토록 조심스러운 서정이 좋아질 줄은 몰랐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계속 시를 사랑해온 사람인 것 같다. 여름이 되면 늘 생각나는 허수경 시인의 <레몬>도 그가 사다 준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에 수록된 시다.
그 시집의 2부에 실린 시는 전부 과일이나 채소나 식물 이름이다. 나는 그중에 <레몬>을 제일 좋아하는데, 읽을 때마다 어디선가 레몬향기가 스쳐 지나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고, 달콤한 침이 돈다.
레몬
당신의 눈 속에 가끔 달이 뜰 때도 있었다 여름은 연인의 집에 들르느라 서두르던 태양처럼 짧았다
당신이 있던 그 봄 가을 겨울, 당신과 나는 한 번도 노래를 한 적이 없다 우리의 계절은 여름이었다
시퍼런 빛들이 무작위로 내 이마를 짓이겼다 그리고 나는 한 번도 당신의 잠을 포옹하지 못했다 다만 더운 김을 뿜으며 비가 지나가고 천둥도 가끔 와서 냇물은 사랑니 나던 청춘처럼 앓았다
가난하고도 즐거워 오랫동안 마음의 파랑 같을 점심 식사를 나누던 빛 속, 누군가 그 점심에 우리의 불우한 미래를 예언했다 우린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우린 그냥 우리의 가슴이에요
불우해도 우리의 식사는 언제나 가득했다 예언은 개나 물어가라지, 우리의 현재는 나비처럼 충분했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그리고 곧 사라질 만큼 아름다웠다
레몬이 태양 아래 푸르른 잎 사이에서 익어가던 여름은 아주 짧았다 나는 당신의 연인이 아니다, 생각하던 무참한 때였다. 짧았다, 는 내 진술은 순간의 의심에 불과했다 길어서 우리는 충분히 울었다
마음속을 걸어가던 달이었을까, 구름 속에 마음을 다 내주던 새의 한 철을 보내던 달이었을까, 대답하지 않는 달은 더 빛난다 즐겁다
숨죽인 밤구름 바깥으로 상쾌한 달빛이 나들이를 나온다 그 빛은 당신이 나에게 보내는 휘파람 같다 그때면 춤추던 마을 아가씨들이 얼굴을 멈추고 레몬의 아린 살을 입 안에 굴리며 잠잘 방으로 들어온다
저 여름이 손바닥처럼 구겨지며 몰락해갈 때 아,
당신이 먼 풀의 영혼처럼 보인다 빛의 휘파람이 내 눈썹을 스쳐서 나는 아리다 이제 의심은 아무 소용이 없다 당신의 어깨가 나에게 기대오는 밤이면 당신을 위해서라면 나는 모든 세상을 속일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 온 여름에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수줍어서 그 어깨를 안아준 적이 없었다
후회한다
지난여름 속 당신의 눈, 그 깊은 어느 모서리에서 자란 달에 레몬 냄새가 나서 내 볼은 떨린다. 레몬꽃이 바람 속에 흥얼거리던 멜로디처럼 눈물 같은 흰 빛 뒤안에서 작은 레몬 멍울이 열리던 것처럼 내 볼은 떨린다
달이 뜬 당신의 눈 속을 걸어가고 싶을 때마다 검은 눈을 가진 올빼미들이 레몬을 물고 향이 거미줄처럼 엉킨 여름밤 속에서 사랑을 한다 당신 보고싶다, 라는 아주 짤막한 생애의 편지만을 자연에게 띄우고 싶던 여름이었다
부검실을 배경으로 하는 일본드라마 <언내추럴>의 주제가 Lemon도 아름다운 가사를 가진 명곡이다. 싱어송라이터가 처음부터 드라마 주제가로 쓴 곡이라 드라마의 서사와도 연결되는데(부검실에서는 시체 냄새를 가리기 위해서 레몬을 사용한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허수경 시인의 <레몬>처럼 잃어버린 과거로 남아버린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에 대한 내용이다.
어떤 시절을 함께한 과거의 인연을 표현하기에는 아릿하게 시고 씁쓸한 맛과 못 견디게 유혹적인 향기를 동시에 가진 레몬만큼 잘 어울리는 것은 없겠다. 씹으면 고통스러울 정도로 신맛과 도저히 잊기 어려운 향기. 그 과일은 밝고 눈부신 빛인 동시에 아프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상징하기에 딱 알맞은듯하다.
그날의 슬픔조차 그날의 괴로움조차
그 모든 것을 사랑했어 당신과 함께
가슴에 남아 떨어지지 않는 씁쓸한 레몬의 향기
비가 그칠 때까지는 돌아갈 수 없어
반으로 자른 열매의 한쪽처럼
지금도 당신은 나의 빛
- 요네즈 켄시, Lemon
나에게도 아, 이만하면 결코 전적으로 지루한 인생은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 있게 해 주는 순간들이 있었는데 간직하고 있는 시 한 편 한 편은 각각의 순간을 떠오르게 한다.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보물 조개껍데기 같은 시 몇 편을 공유하고 싶다. 실로 좋은 시는 내가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어 지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좋은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아지고, 남을 해치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훨씬 더 적어지는 세상을 희망한다.
진은영, <청혼>
김선우,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사랑에 빠진 자전거 타고 너에게 가기>
황인숙,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시인의 묘>
최승자, <삼십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