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책

[북 리뷰] 최은영, 《밝은 밤》& 《쇼코의 미소》

노무사 송글 2021. 12. 16.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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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몇 년 전, 오랜 친구가 선물해준 《쇼코의 미소》로 최은영 작가를 알게 되었다.
<씬짜오, 씬짜오>, <언니, 나의작은, 순애 언니>, <먼 곳에서 온 노래>는 그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단편들이다.
세 이야기에서는 공통적으로 가족도 연인도 아닌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지지하고 곁을 지키는 사람들이 나온다.
《밝은 밤》에서도 물리적으로 곁에 있지 않을 때에도 서로에게 마음의 방을 내어주고 사는 사람들이 나온다.


1.

"증조모는 새비 아주머니를 잘 알지 못했던 그 때부터도 새비 아주머니를 잃을까봐 덜컥 겁이 났다. 언젠가 새비 아주머니가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고 더이상 그 말간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얼어붙은 얼굴로 자신에게 실망했다며 등을 돌린다면 숨쉬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사람들은 원래 기래.' 고조모가 증조모의 마음속에서 말했다. '사람한테 기대하지 말라우.' '어마이, 나는 사람들한테 기대하는 기 아니라요.' 증조모는 생각했다. '나는 새비한테 기대하는 기야.'"

"어쩌면 친구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새비 아주머니는 진땀을 흘리듯이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이 그동안 그녀에게 얼마나 의지했는지, 그녀와 주고받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 것이었는지 이해했다. 살아나게 된다면, 새비 아주머니는 생각했다. 삼천이가 살아나게 된다면 하늘 아래 부끄러울 것 없는 사람으로 살겠다고 하늘에 빌었다."

 

나는 사람에 대한 기대가 적고, 그런 태도로 사는 편이 사람들에게 덜 상처받고 덜 실망하고 덜 미워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는다.
인간은 결정적인 순간에 쉽게 약해지거나 악해지고 만다는 것을 알고, 그런 것은 누군가가 특별히 나빠서가 아니라 인간은 원래 그런 엇비슷한 한계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서 그렇다고 가엾게 여길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나름대로의 신념에도 불구하고 최은영 작가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는 맑은 애정과 투명한 호의가 가능하다는 것을 자꾸만 믿고싶어져서 울게 된다.

《밝은 밤》도 그런 이야기였다. 인물들이 약간 비겁해지는 순간이라든지, 단편들에서보다 관계가 더 입체적으로 그려진 점이 좋았다.


2.

"인내심 강한 성격이 내 장점이라고 생각했었다. 인내심 덕분에 내 능력보다도 더 많이 성취할 수 있었으니까. 왜 내 한계를 넘어서면서까지 인내하려고 했을까. 언제부터였을까. 삶이 누려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수행해야 할 일더미처럼 느껴진 것은. 삶이 천장까지 쌓인 어렵고 재미없는 문제집을 하나하나 풀어나가고, 오답노트를 만들고, 시험을 치고, 점수를 받고, 다음 단계로 가는 서바이벌 게임으로 느껴진 것은. 나는 내 존재를 증명하지 않고 사는 법을 몰랐다. 어떤 성취로 증명되지 않는 나는 무가치한 쓰레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 믿음은 나를 절망하게 했고 그래서 과도하게 노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날 그 자리에서 불안을 느꼈다. 경계하지 않을 때, 긴장하지 않을 때, 아무 일도 없으리라고 생각할 때, 비관적인 생각에서 자유로울 때, 어떤 순간을 즐길 때 다시 어려운 일이 닥치리라는 불안이었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전전긍긍할 때는 별다른 일이 없다가도 조금이라도 안심하면 뒤통수를 치는 것이 삶이라고 할머니는 생각했다. 불행은 그런 환경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겨우 한숨 돌렸을 때, 이제는 좀 살아볼만한가보다 생각할 때."

 

또 가끔은 마음을 그대로 들킨 것 같아 얼굴이 공연히 달아오르는 문장들도 있다.


3.

"그는 세상 사람들이 덜 고통받고 더 잘사는 세상을 꿈꾼다는 말을 하면서도 할머니의 발이 얼마나 부어있는지, 가끔씩 배가 뭉칠 때마다 할머니가 얼마나 큰 두려움을 느끼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말하면서 할머니가 벌어온 돈은 아무렇지 않게 앗아갔다. 그런 그를 볼 때면 할머니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분노가 서린 웃음이었다."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들이 생각이 나는 대목이 많아 울컥했다.

 

물 대신 따라주시는 결명자차, 따뜻한 할머니 침대.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나의 고향이었던 것만 같은 부산의 오래된 아파트에는 이제 할머니가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아직도 종종 받아들이기 어렵다.

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아이였고 앨범을 들여다보며 할머니에게 옛날 이야기를 자꾸만 묻곤 했다. 할머니가 서너살 때 요절하셨다는 할머니의 엄마 이야기, 학교다닐 때 운동회 이야기, 전쟁 때 내려온 어린 인민군들과 친하게 지냈던 이야기들을 끝도 없이 듣고 있다 보면 그 때는 가본 적도 없었던 할머니 고향 군산이 눈 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또다른 할머니의 남편은 방구석 혁명가였다. 그야말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기지 않았고, 새날이 채 오기도 전에 망가져버렸다. 그가 만민이 능력껏 일하고 필요껏 받는 세상을 꿈꾸는 동안 가정의 생계를 책임진 것은 그의 아내였고, 자식들을 돌본 것은 그의 장모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할머니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언제였을까를 생각하다가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그의 이상이 참 공허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그가 희망하던 세상이 도래했을 때의 모습대로 살지 못했으므로.


《밝은 밤》을 이틀만에 단숨에 다 읽고 나니 엄마와 엄마의 엄마인 할머니, 할머니의 엄마, 그리고 그 분의 엄마를 생각하게 되면서 그녀들 인생의 이야기를 속속들이 듣고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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