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책

[북 리뷰] 정보라, 《저주토끼》

노무사 송글 2022. 5. 18.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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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요즘 여기저기서 입소문 좀 타고 있는듯하다.

밀리의 서재에 있길래 출퇴근길에 호로록 다 읽었다(사실 잘 안읽히는 단편은 대충 넘겼다).

언제 마지막으로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공포문학은 정말 오랜만에 읽은 것이다.

 

<저주토끼>는 10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이야기에서 피, 내장, 배설물이 적나라하게 난무하고, 누군가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의 진짜 잔혹한 부분은 내장이 튀어나오고 인육이 끓는 장면이 아니라 결말에서 느껴지는 서늘하도록 쓸쓸한 심상이다. 

원래 세상은 쓸쓸한 곳이고 모든 존재는 혼자이며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 혹은 복수는 경우에 따라 반드시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필요한 일을 완수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쓸쓸하고 인간은 여전히 외로우며 이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렇게 쓸쓸하고 외로운 방식을 통해서, 낯설고 사나운 세상에서 혼자 제각각 고군분투하는 쓸쓸하고 외로운 독자에게 위안이 되고 싶었다.
그것이 조그만 희망이다.

- 작가의 말

너무 쓸쓸해서 냉정하다고까지 느껴질 지경이라고 생각했는데 작가의 말에서 비밀을 찾았다.

 

 

쓸쓸하고 고요한 건 매한가지지만 마지막 단편 <재회>는 또한 못견디게 아름답다.

어떤 사람들에게 삶이란 거대한 충격과 명료한 생존본능이 동시에 찬란하게 떠오른 과거의 어느 시간에 갇힌 채, 유일하게 의미 있었던 그 순간에 했듯이 자신이 살아 있음을 되풀이해 확인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 순간은 짧지만, 순간이 지나간 뒤에도 오래도록 자신의 생존을 그저 무의미하게 반복해서 확인하는 동안 좋은 시간도 나쁜 시간도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빠져나간다. 삶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과거에 고정되어버린 사람들, 그도, 그의 할아버지도, 그의 어머니도, 나도, 살아 있거나 이미 죽었거나, 사실은 모두 과거의 유령에 불과했다.
"할아버지는 이미 지나간 전쟁을, 이미 사라져버린 수용소를 평생 두려워하면서자기가 스스로 만들어낸 수용소 안에서 살고 있었던 거야, 할아버지는 죽고 난 뒤에야 정말로 자유롭게 자기 도시의 거리를 걸을 수 있게 됐어."
그가 중얼거렸다.
내친 김에 나는 물어보았다.
"그때 광장에서 한 방향으로 걸어가던 나이 든 신사분은 누구야?"
"전쟁 때 광장에서 총을 맞은 사람일 거야."
그가 말했다.
"거기서 자주 봤어. 길을 건너서 어떻게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아마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길에서 죽었을거야."
"어째서 그런 불행한 시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Wiedziałem, że będzieś.” (네가 올 줄 알고 있었어.)
그가 말했다.
“Czekałem.” (기다리고 있었어.)

-

“Wróci.” (돌아올 거예요.) 남자가 중얼거렸다. “Zawsze wraca.” (항상 돌아오니까.)

-

“Kiedyś wróci tu.” (언젠가 이곳에 돌아올 거야.)
그가 말했다.
나는 웃었다.

 

길지 않은 이야기에서 돌아온다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반복된다.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묶여 있는" 사람들은 "돌아온다."

 

2차대전의 유령들과 수용소의 희생자가 등장해서 그런지 오디오북 소라소리에서 들었던 왕웨이롄의 「걸림돌」의 지구 반대편 이야기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호불호가 갈리는 것 같지만 나는 재밌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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